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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시간고세이 2023. 7. 26. 21:01
“안 가면 안 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와 고엔지 슈야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일어나려던 세이나 히카리의 소맷자락을 아주 조금 떨리는 손으로 잡으며, 그보다는 아주 조금 더 떨리는 목소리로 그 말을 하는 그는 마치 금방의 수업에 나온 고전 문학 속에 등장하는 풋풋하고 순진한 소년과도 같아서. 까무잡잡한 피부가 아니었다면, 슬쩍 피하는 시선과 함께 터질듯한 뺨이었을게 분명한 열기가, 세이나 히카리에게도 전해져왔다. 그 찰나의 어색한 순간을 지나,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히카리가 먼저 자세를 고치며 입을 열었다. “소, 소개팅 말이야?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안 가면 소개시켜준 친구도 곤란하잖아. 이미 가기로 했다며.” 이 분위기를 초래한 발언의 당사자치고는 상당히 빠른 태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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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일고고세이 2023. 7. 26. 17:36
내가 너에게 저지른 잘못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가장 흉한 상처를 남기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으로 지치게 하고, 그럼에도 끝까지 기다려 줄 것이라는 서로 간의 믿음으로 또 한 번 너를 아프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휘둘렀으나, 그것이 실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너를 주저앉혔고, 그 선택을 한 이상 나는 혼자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너를 뒤로 남기고, 옆을 비운 채, 나는 홀로 앞을 바라보았다. 나의 외로움 따위는 너의 그리움에 비할 바도 못 되었겠지. 수없는 너를 남겨두고 온 그 앞은 빛이 없어 어두웠다. 그 어두운 곳에 가장 먼저 불을 밝혀 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불꽃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아간 자리는 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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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 속 개구리고세이 2023. 7. 26. 09:28
“히카리 말이야, 고엔지 앞에서 유독 더…” 우연히 나온 화제에, 누군가 꺼낸 말이었다. 지나가던 세이나 히카리가 그것을 듣고도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 말이야?” 불쑥, 튀어나온 당사자에 이야기를 꺼낸 이까지 놀라 눈만 껌뻑이던 것도 잠시, 히카리를 세워놓고 요리조리 관찰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평소에는 별로 안 그런 것 같은데… 오히려 이쪽이 본래 모습인 것처럼… 꽤 긴 시간을 그러고 있었음에도 히카리는 가만히 그 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드디어 결론을 내렸는지 히카리 앞에 마주 선 아이는 어깨에 턱,하고 손을 얹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히카리, 너 고엔지 앞에서 더 어리광쟁이가 되는 거 알아?” 본인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냐는 물음이 된 것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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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닮는다더니.고세이 2023. 7. 26. 02:44
“얘가 어릴 때는 얌전했는데 커가면서 점점 더 말괄량이가 되어간다니까.” “그래서, 싫습니까 여사님?” “어이구 싫기는. 이 엄마는 오히려 안심이다? 말괄량이라도 제대로 된 남자친구도 하나 딱 붙잡고 있으니.” “제대로 되기는, 거 우리 딸이 아주 아깝네그려. 방에 틀어박혀 애를 울린 게 몇 번인데.” 세이나 가家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대꾸 받지 못할 한마디를 신문 속에 숨어 뱉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그새 ‘제대로 된 남자친구’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 버린 두 여자. 처음엔 분명 딸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는데, 세 사람이 모이면 항상 이런 식이다. “우리 예비 사위는 언제쯤 예비를 떼려나? 아직 소식 없어, 딸?” “…뭐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난 지금도 좋은걸.” 히카리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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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더 강하게.고세이 2023. 7. 25. 16:54
고엔지 슈야는 몸에 흉터가 많았다. 크게 눈에 띄는 상흔은 없었지만 어깻죽지의 쓸린 상처부터 종아리의 긁힌 것까지 몸 이곳저곳에 박혀있는 자잘한 흔적들은 그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것이 단순히 일상에서 남겨진 상처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수가 많아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자리 잡고 있는 듯도 보였다. 그 많은 흉을 사랑해주는 이가 세이나 히카리였다. 보듬고 새살을 돋게 하는 것이 아닌, 흉터 자체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세이나 히카리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연인의 흉터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뒤돌아 요리하는 그를 껴안고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나, 히카리의 시선 조금 위쪽, 고엔지의 목 뒷덜미에 오래된 듯한 무언가의 흔적이 보였다. 까슬까슬. 이건 언제 생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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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붉은 이유고세이 2023. 7. 21. 22:22
“작년 결승 때는 왜 나오지 않은 거야?” 멋모르고 물었던 한 마디가, 너에게 콕 박혔나 보다. “신경 꺼.” 무심하게도 날아든 한 마디가, 나에게도 콕 박혔다. 내가 박은 대못과는 달리 너는 작은 가시밖에 박을 수 없어서, 장미인 줄로 알았다. 그래서 얼른 뽑아버렸다. 더 깊이 파고들어 덧나지 못하도록. 따끔따끔. 아주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장미에 또 손을 댔다. 엔도 마모루, 그 축구 소년 또한 어린 왕자였다. 너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 가시를 모조리 뽑아내어 속을 드러냄으로써. 어린 왕자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건넨 첫 마디. 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너를 두 번째 장미로, 여우로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너의 바람막이가 되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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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변하는 건 없을 거야.고세이 2023. 7. 20. 23:43
잘했어. 고엔지 슈야가 그의 연인을 향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이다.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을 때, 앉은 자리에서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잠을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등.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중에도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꺼내야 할 말로서 칭찬이 가장 적절한 상황이긴 했다. 세이나 히카리가 특히나 맛있는 식사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고 조잘거릴 때,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고 감상을 뱉을 때, 간만에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개운하다며 하루를 시작할 때. 그런, 지극히 평범한 대화.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 고엔지 슈야에게 있어서는 연인에게 잘했어, 라고 말하며 두 뺨을 감싸고 눈을 맞추거나 이마에 입술을 두었다 떼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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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고세이 2023. 7. 19. 20:49
세이나 히카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주 빼어난 미모도, 타고난 몸매도 아니지만 다른 이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발산하는 사람. 그 매력으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바로 세이나 히카리이다. 하나의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사랑스러움은, 당연하게도 그 세상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잠든 모습부터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 그리고 활짝 웃는 모습까지. 수만 가지 모습의 그 사랑스러움에, 가끔은 그의 모든 것이 그렇게 작고 소중할까,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진정한 세이나 히카리를 아는 이는 그의 잠잠함을 깨지 않으려 애쓴다. 그의 분노를 감내하는 일이 상당히 고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잠재우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일. 고엔지 슈야는 세이나 히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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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請고세이 2023. 7. 19. 00:46
청혼. 혼(婚)을 청하다. 혼인,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을 청하는 일, 청혼. 어느 쪽이 먼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한발짝 옆으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갈 용기를. 또한 그 손이 뿌리쳐질 경우의 상처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그리고 그전까지는, 다른 한쪽이 기다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대가 한발짝 더 다가와 주길, 빈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는 일. 청혼. 맑은 혼. 눈이 시리게 푸른 서로의 혼에 맞닿도록, 맑게 공명하도록. 너의 울림에 이끌려, 내가 울리도록. 나의 울림으로, 네가 울리도록. 청아한 파장에 나의 혼이 번지고, 따스한 파동에 너의 혼이 물든다. 우리가 우리의 푸름으로 퍼질 수 있게, 서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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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ose고세이 2023. 7. 18. 19:28
우리, 같이 살까? 우리의 동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자, 혹은 아니. 그런 답은 듣지 못했다. 그저, 좋아. 단지 그뿐이었다.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그때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같이 사는 것뿐인데. 지금도 서로의 집에 들러 가족끼리 안부를 묻는 일이 다반사이며, 그렇지 않은 날에조차 매번 얼굴을 보고 붙어 다니는데. 다만, 좋다고 답하는-답이 아닌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그때의 너의 얼굴이,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그저, 좋았다. 나를, 받아줄래? 우리의 재결합 또한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역시, 좋아. 단지 그뿐이었다.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한 말의 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보고 좋다고 혼잣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너의 표정은 이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