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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음 아래엔 정의가 있다. (핑크솔트@P7CXR0R 님 커미션)고세이 2024. 12. 25. 00:00
세상이 혼란해질수록 정의는 진가를 발하는 법이다. 범죄자들이 늘어나자 문학인들이 책 서두에 적어두기 시작한 문장이었다. 번잡하게 발전된 사회에서 좀도둑은 대도가 되고, 살인자는 연쇄살인마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빛 아래 그림자가 따라붙듯, 성장한 인프라 아래엔 혜택을 받지도 못하는 슬럼층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택할 여지도 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당대의 현실을 비난했다. 그리하여 세계 최초로 일본에서 사회 문제를 짚으며 일어난 단체가 있었다. 웬 주식 관련 동아리원들이 만든 일종의 회사였다. 자기네들은 꼭 세계에 깔린 모순을 해결하겠다며 후원 광고를 종종 내보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열풍을 타고 그런 명목으로 설립된 기업들은 해가 지날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실속만 챙기는 민간 기업만이 온갖 TV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배를 불릴 뿐,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곳일랑 존재하지 않았다.
고엔지는 민간 기업에 몇 번 채용 지원을 넣었다가 방향성이 맞지 않는단 평가를 들으며 떨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니 입사하지 못한 이유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진정 정의를 쫓는 사람은 받질 못한다, 그게 민간 기업들이 가진 대체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돈을 좇는 부조리함과 속물적인 내부 사정을 고발해버리면 곤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여하튼 그런 행태에 신물이 나기도 전에 해결책이 들어섰다. 제정신 박힌 민간 기업 여덟 곳이 협심하여 ‘범죄자에게 여지는 없다’라는 신념으로 국제기관에 발을 들인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민간인 사업장이 ‘기구’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고엔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서른세 번의 불합격을 뒤로 한 채 단 한 번의 기회로 국제기관에 입사했다. 170:1의 경쟁률을 통과한 사유는 이러했다.
특이 체질, 현장 활동 특화 전형.
손바닥에서 불이 나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영화를 제외하고. 고엔지는 그런 게 가능했다. 갑자기 온몸에 화염을 두르고 나타나도 화상은커녕, 오히려 본인이 불길을 키워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초능력자처럼. 고엔지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기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불을 쓰기도 했고, 물을 쓰기도 했고……. 그것을 떠나 아예 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형태는 다양했으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일반적이지 않은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일각에선 누군가 짜고 치는 판이라며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했지만,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이 빗발치든 고엔지 슈야에게 과학적 논리를 초월하는 어떠한 능력이 있음은 사실이었으니까. 국제기관은 그걸 높이 산 듯했다. 그들의 목표는 빌런―입사 후에나 알게 된 건데, 이 기관은 단순 범죄자보단 범죄자를 이용하는 집단 쪽을 뒤쫓는 데 치중되어 있었다―을 처단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을 테다. 덕분에 준비하던 2차, 3차 면접 대비용 노트를 버리고 기관에서 지원하는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고엔지는 곧바로 현장팀에 들어갔다.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기관에다, 특이 체질이랍시고 모인 이들은 평소에 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보니 처음엔 어영부영하기 바빴다. 고엔지도 첫 임무 땐 함께 간 동료의 옷을 홀랑 태워 먹고 돌아와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했었다. 다행히 그것도 일 년이 지나자 익숙해졌다. 빌런이라 따로 명명하길래 덜컥, 긴장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빌런 개개인의 이름을 들어도 별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동료들에게서 또, 라는 투정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고엔지는 일할 때 있어 안일함을 가장 경계하는 편이었으나, 일을 오래 하며 익숙해진 덕분에 요령껏 행동할 줄은 알게 되었다. 국제기관에 입사한 건 생각보다 별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빌런 측 말단 하나가 경황 없이 기관 건물에 침투하려고 했던 일이나, 누가 발을 헛디뎌서 폭탄 해체에 실패할 뻔했던 일,
“슈야, 좋은 아침이야!”
“아……. 히카리. 좋은 아침.”
팔자에도 없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정도. 일평생 사내연애를 하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던지라 처음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인사하던 게 삼 개월쯤 지나서 괜찮아졌으니, 히카리가 이별을 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가 밝은 빛 머리카락을 응시하다가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하다가 온 것 같은데, 덧붙이자 싱글벙글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고 싶어서 왔지. 고엔지는 아직 그 말에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걸 가만히 느끼며 고개만 까딱이는 게 최선이었다. 겉으로 티가 나진 않을 테니, 그걸 위안 삼아야 했다.
“들어줄까?”
“괜찮아. 이 정도야 거뜬하고. 아 참. 아까 소장님께서 널 찾고 계셨던 같은데. 방송하시기 전에 다녀오는 거 어때?”
“……소장님이?”
최근에 따로 불렀던 적이 있던가. 고엔지는 조심히 빠져나온 히카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정리해준 뒤 걸음을 옮겼다. 꼭대기 층까지 가려면 엘리베이터가 편하긴 할 텐데. 이 시간이면 사람이 많아 오래 걸릴 테니, 계단을 쓰는 쪽이 더 낫겠다. 재빠르게 판단한 뒤 그가 계단을 서너 개씩 밟아 올라갔다. 도착하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볍게 숨을 뱉고 옷매무새를 만졌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소장실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고엔지는 마른 침을 삼킨 뒤 먼저 문을 열었다.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서두에 올리자, 노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예의 소장은 남을 참 곤란하게 만드는 고질적인 습관이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상대방이 의중을 가늠조차 할 수 없도록 의뭉스럽게 구는 것이 특기였다. 고엔지는 파악하기 어려운 속내를 짐작하는 걸 그만두었다. 타이밍 좋게 소장이 입을 달싹거렸다. 일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걸 부탁해서 미안하네만, 그리 서두가 시작하자 고엔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자리에 붙박였다. 단독 임무인 모양이었다. 동료를 부르지도 않았고, 저런 식으로 불안하게 말을 이끄는 걸 보면 아마 위험한 난이도일 테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전 몇 개가 떨어졌다. 빌런의 본거지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그곳을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 임무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다, 가라. 문장은 참 길었는데 요약해보니 그게 전부였다. 고엔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무는 거절하지 않는 게 도리였다.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일이었으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빌런인 척하면서 정체만 들키지 않는다면 안전하게 빠져나올 순 있을 것 같았다. 혹여 그 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고 해도, 잘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소장은 몇 가지 주의점을 알려주었다. 빌런들이 코드네임을 정하는 방법이나, 거기서 절대 발설해선 안 되는 극비 사항, 마지막으로 정체를 들켰을 경우 선택 가능한 방법 두 가지. 자결, 혹은 도주. 그게 실감나진 않아 고개만 까딱였다. 고엔지는 그것들을 전해 들은 뒤 곧장 기숙사 짐부터 뺐다.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선 같은 편에게도 정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게 나았다. 그건 히카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래간 보지 못할 거라는 연락을 보내려다가 말았다. 대신 조용히 움직였다. 차라리 장기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자리를 비우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소장에겐 그리 일러두었다.
고엔지는 빌런 쪽에 붙어서―빌런이 됐단 뜻은 아니고―, 제법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 예의 자신을 완전한 빌런 측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몇 번 자질구레한 일에 나설 정도로 소장이 맡긴 임무에 충실했다. 물론 큰 소득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정보 수집에 특화된 요원이 아니었으니, 그나마 알아낸 거라곤 빌런 수장들 몇몇의 이름이나 이곳의 구조도, 어떤 메커니즘으로 다음 활동 장소를 정하는지…… 의 일부 정도가 고작이었다. 잠입한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가는데 난항만 겹쳤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윗선에서 나눠준 짤막한 칼을 챙겨 들고서 로비로 나갔다. 술에 취한 놈들이 복도에 줄기차게 늘어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에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때였다. 쓰러진 놈들을 제외하고 여러 명이 일제히 한 곳으로 움직이는 것 말이다. 전달받은 사항이라곤 일절 없었던 고엔지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눈치껏 행동했다. 로비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았던 빌런 대여섯 명이 휴대전화를 확인하곤 곧장 일어났다. 그리고 또 움직이는 무리에 합류해 걸어가는 게 아니던가. 필시 무슨 일이 난 거라고 은연중에 확신했다. 고엔지는 그 행적을 따라 걸었다. 뒤에서 누가 붙잡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직진했을 테였다.
“잠깐 나 좀 보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누군지 파악하기도 이전에 나온 행동이었다. 여긴 위계질서가 확고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신입 말단에 속하는 고엔지로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게 최선이었다. 바짝 붙어서 오라는 말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나저나 누구였는지. 뒤통수만 보고는 도통 예측할 수가 없었다. 가늘어지는 시야 틈으로 저를 부른 사내의 모습을 담았다. 목소리가 익숙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구김 없는 거동으로 보아 아마 빌런 구조 상부에 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이름을 못 외운 이도 있을 줄이야. 고엔지는 다시금 통감했다. 그는 ‘잠입 수사’와는 맞질 않았다. 놓치는 정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거면 또 모를까.
생각이 끝물에 다다를 즈음 앞서 가던 사내의 걸음도 뚝, 하고 끊겼다. 거대한 철제문이 길을 막고 있었다. 사내는 홍채를 찍어 문을 열었고…… 고엔지는 거기서 눈을 의심했다. 익숙한 사람 하나가 문 너머로부터 살며시 보였던 탓이었다. 밝은 빛 머리카락,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잊을 수가 없는 상대.
히카리,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히카리는 마찬가지로 국제기관 소속이었으며, 정보를 캐내는 데 안성맞춤인 인력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아니라 자세히 설명할 순 없었다. 감각이 이미지가 된다, 매사 기민하게 반응하여 마치 상품을 스캔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것의 특징이 나열된다는……, 설명을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기관 쪽에선 그걸 이유로 그녀를 임무에 보낸 모양이었다. 단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중요한 걸 알아차리니.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전투 센스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빌런들이 드글거리는 곳에 혈혈단신으로 올 만한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고엔지는 습관처럼 히카리의 허리춤이나 어깨 언저리를 살폈다. 무기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어디서 훔친 것 같은 망치 하나가 끝이었다. 골이 울렸다. 도대체 상부는 무슨 생각으로 히카리만 이곳에 보낸 건지, 아니면 명령도 없이 멋대로 잠입해온 건지. 최대한 모습을 숨기고자 뒤로 몇 발자국 빠졌다. 그걸 용케도 알아챈 사내가 작게 속삭였다.
“동료라서 그런가? 평소엔 아무 생각도 없이 다니는 것 같더니만. 줄을 잘 서는 게 좋을 거야.”
정곡을 찔리는 데 더불어 의심까지 받고야 말았다. 고엔지는 뒤늦게 사내의 정체를 추측했다. 빌런들에겐 우두머리가 다섯 정도 있었다. 다섯의 생김새는 이미 본 적 있어 마주치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남잔?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 얍삽하게 구는 작태며, 이상할 만큼 빠른 눈치, 게다가 이미 정보가 등록된 홍채. 결론은 명확했다. 우두머리 위에 사람이 하나 더 있던 셈이었다. 고엔지는 마른 침을 삼키며 도로 자리에 섰다. 그리고 히카리를 마주 봤다. 충격받은 듯한 기색이 온 얼굴에서 넘실거리고 있어 시선을 두기가 어려웠지만, 당장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건 임무였다. 옆으로 비킨 사내가 걸걸하게 웃었다. 꼭 조소처럼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지 않나.”
처리하란 말이 덧붙었다. 딱히 방법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고엔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검지를 선두로 자그마한 불꽃이 튀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둔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건물 구조는 그가 아주 잘 알았고, 중요하진 않더라도 정보가 있었으니, 철수만 한다면. 그런다면 히카리가 다칠 일이라곤 없을 텐데, 가정했다. 빌런 틈에 잠입한 이래로 울린 적 없는 부착용 무전기를 내려다봤다. 국제기관 소속 고엔지로선, 정의를 뒤쫓다 못해 그것을 위해 존재하다시피 했던 그에겐 선택할 수 없는 이지선다에 가까웠다. 두 가지 기로 대신 달아오른 혈관에 집중했다. 화력을 조금 줄이는 게 나을 듯싶어서 그렇게 했다. 일렁거리는 연기가 잦아들 즈음에 히카리가 먼저 제게 달려들었다. 고엔지는 그에 응했다. 재빠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주먹을 휘두를 것. 숱하게 외운 매뉴얼을 이럴 때 되새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망치가 조금 느린 박자로 허공을 갈랐다. 맞아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동작이었다. 왼쪽으로 몸을 틀어 그걸 피하고, 히카리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조금 태워 먹었다. 남이 보기엔 공격 불발로 보일 만한 행동이었다. 머리를 노리려다가 실패한 거라고. 그가 제대로 싸우질 못한다는 단적인 면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겠다. 실상은 한참 봐준 것에 불과하다만, 그걸 알아챌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고엔지는 차라리 말단답게 서투른 척을 하기로 했다. 사내 하나만이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는 게 전부였다. 나머진 자신을 빌런이라고 오인하고 있을 테니……. 사내에게 지적받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다리를 가볍게 휘둘러 또 어디론가 궤적을 그리려고 하는 망치를 걷어찼다. 대리석 바닥과 부딪혀 쨍그랑, 머리 부분이 깨졌다. 히카리는 그 조각이라도 주워서 쓰려고 했다. 남은 파편을 불로 태우지 않았으면 히카리의 손이 피투성이로 물들 게 뻔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도망치라고 눈짓을 주려 했다. 히카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따라 성공 여부는 갈리겠지만, 고엔지는 어떻게든 그녀와의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응당 사랑하는 이의 몸에 제 손으로 상처를 입히는 일 따윌 반기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주 극소수의 특이 취향들만 제외한다면, 대다수는 그런 상황이 닥치는 걸 꺼렸다. 고엔지도 그중 하나였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본인이었는데,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던 것을 제 손으로 망가뜨려야 한다면? 선택할 새도 없이 당장 닥친 일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나. 속이 쓰렸다. 내색할 정돈 아니었지만, 그가 인지할 정도는 됐다. 사내가 음습하게 웃는 소리를 내지만 않았어도 눈썹을 찡그렸을 텐데. 여기서 나가라고 신호라도 주었을 것을 그러지 못하고 한숨을 내뱉는 걸로 갈무리했다. 오래 걸리는군, 사내의 느긋한 말투가 귀에 꽂혔다. 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한 높낮이에 식은땀을 훔치며 자세를 낮췄다. 히카리가 발을 그의 쪽으로 휘둘렀다. 그걸 피했다. 피하고, 비켜나가게 휘두르고……. 한참 동안 반복했다. 먼저 공격할 용기가 생길 때까지 계속.
히카리를 제압한 건 결과적으로, 고엔지 슈야가 아니었다. 물론 옷을 검게 태운 거나, 크고 작은 화상 자국을 남긴 건 그가 맞았다. 피부를 새빨갛게 만든 것도 고엔지였다. 다만 제압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이전에, 뒤늦게 도착한 빌런 몇몇이 히카리의 뒷목을 툭, 치는 것만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고엔지는 손바닥에서 모닥불만 한 연기를 피워내다가 말았다. 사내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수고했다는 말, 이제 데려오라는 전언까지. 철수하라는 한 마디에 주변 일대가 울렁거리며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고엔지에게도 명령이 하나 내려왔다. 따라올 것.
고엔지는 사내에게 짐짝처럼 들린 히카리를 응시하면서도 차마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묵묵히 뒤를 따르며 달랑거리는 팔다리를 응시하는 게 당장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사내를 처리하고 도주에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만약 그렇게 흘러갈 경우, 임무 진척도는 몇이라고 봐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소장은 적임자를 잘못 찾은 것 같았다. 자신은 정보 관련 일엔 정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내는 이윽고 걸음을 멈췄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외진 별실이었다. 고엔지는 숨을 죽이고 그 뒤를 밟아 함께 문을 열었다. 넓은 공간 사이로 덜렁, 홀로 서 있는 의자가 보였다. 익숙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잠입해있던 동안 고엔지는 이곳을 딱 한 번 찾아온 적 있었다. 까닭은 그랬다. 배신자 척결이라고, 왜, 책에서 흔하디흔하게 나오는 소재거리가 아니던가. 고엔지는 그때 참상을 봤었다. 그러니 지금 일어날 일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고 넘어갈 수야 없겠지. 가령 정보를 넘겨주는 쥐새끼 같은 게 있었다거나……. 그럼 곤란한 게 한둘이 아니거든.”
안 그래? 자신을 겨냥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아마 겨냥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내는 놀라울 정도로 직감이 좋았으며, 동시에 이런 허술한 잠입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무른 인물이 되지 못했다. 온전히 히카리를 응시하는 시선 너머엔 아마도 반동분자 취급받는 고엔지 슈야가 있을 게 뻔했다. 그는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기관이 준 무전기에선 연락 하나 없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사내가 히카리를 의자에 앉혔다. 혹여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밧줄을 가져다가 동여매듯 묶었다. 축 늘어진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고엔지는 히카리의 몸에 남은 화상 자국을 바라보다가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빨개진 흔적 아래로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다만 아프지 않았다. 당최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나 싶었다. 제아무리 임무의 일환이라고 하더라도 고엔지는 동료에게, 그것도 지켜 마지않는 상대에게 상처를 남겼다. 나중에 보기 싫은 흉터로 남을 만한 화상을 만들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이래서야 빌런과 다를 게 무엇인지.
히카리는 그때쯤 정신을 차렸다. 총명함에 물들어 있는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퇴로를 막고, 몇 가지 장비를 챙겨왔다. 고엔지는 다른 곳으로 신경을 쏟았다. 맨정신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온갖 사건을 떠맡아 볼 것, 못 볼 것 가리지 않고 기억한 뒤 보고하던 그로선 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질책을 받기 충분한 처사였다. 그렇다 한들 고엔지는 히카리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스스로에 관한 혐오와 상황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죄책감에 가까웠다.
하루 같은 몇 시간이 지났을 때, 바지춤이 미세히 진동했다. 고엔지는 습관적으로 그쪽을 더듬다가 눈치챘다. 무전이었다. 화장실을 핑계로 문 근처엘 가며 무전 내용을 확인했다. 추가로 보낸 인원이 정보 수집을 끝마쳤으니, 이제 합류하여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고엔지는 곁눈질로 히카리를 살폈다. 다시 기절할 법도 한데 아슬아슬하게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법한 행위들에도 기어이 핏발 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정보를 모으고 있던 걸까? 이윽고 시선을 사내의 뒷목으로 옮겼다. 아직 처리할 순 없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어디까지나 적진 사찰에 불과했다. 수장직을 꿰차는 인물을 독단적인 판단으로 죽였을 때, 혹은 그에 준하는 짓을 했을 때. 과연 그건 기관을 위한 행동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감정에 휩쓸려서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버릇은 고친 지 오래였다. 고엔지는 불을 붙이는 대신, 임무 전 동료가 챙겨주었던 연막탄을 손에 쥔 채 의자와 사내 사이를 갈랐다. 펑, 나직한 파열음과 함께 흰색 분말이 일대를 자욱하게 감쌌다. 그 틈을 타 히카리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의자에 꼼꼼히 연결되어있는 줄을 풀지 못해 통째로 들고 나오긴 했지만, 아지트에서 한참 멀어진 후엔 그걸 침착하게 불로 그을려 끊어냈다. 두 번째 무전이 울렸다. 마지막 접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고엔지는 한참을 걸어 국제기관 쪽 사람들과 접촉했다. 이동하는 동안 까무룩 잠들다시피 기절한 히카리를 넘겨주었다. 알아낸 정보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우선 치료 시설로 향했다. 조금 전까진 느리게 뛰던 고엔지의 심장박동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치료가 소용이 없다면. 불길한 가정을 세우다가 제 뺨을 후려갈기기도 수차례 반복했다. 고엔지는 소장과의 면담이 끝난 이래로 히카리가 있는 병실에 매일 같이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히카리는 굳게 닫힌 눈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하루가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기어이 일주일을 넘어 한 달쯤 되어가는 무렵까지 단 한 번도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고엔지는 슬슬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자리에서 도망쳤더라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고엔지가 재단하던 건 세계의 평화와 양심이 아니었다. 남의 목숨줄을 저울에 올려두고 어느 쪽이 기울어지는가를 판단했었다. 어리석은 짓이었고, 후회해 마땅하나 그럴 자격이 없는 과오였다. 고엔지는 주먹을 휘두르던 때를 상기하길 그만두었다. 대신 달력을 한 장 넘겼다. 11월을 지나 12월, 그에 겹쳐서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근 한 달 사이에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고엔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지내왔다. 오늘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병문안 선물로 들고 왔던 꽃을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눈만 뜬다면 크리스마스 선물 정도야 다시 챙겨줄 생각이었다. 당장엔 이걸로. ……받아만 준다면, 소원이 따로 없을 텐데.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히카리였다면 아마 구경하자고 졸랐을 만한 양이었다. 매일 참새처럼 짹짹거리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걸 깨달았을 때, 고엔지는 도대체 무슨 표정으로 있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일어나 달라는 말을 하기도 벅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만한 입지가 되지 못했다. 속으로만 연신 세이나 히카리란 이름을 되새기며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차라리 이 침상에 있는 게 자신이었다면, 하고. 동시에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환자감시장치 수치가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고엔지는 다급히 침대 아래 딸린 비상벨을 누르려다가 말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서, 차마 다른 걸 고려할 새도 없었다.
“……어, 여길 내가 왜…….”
“……히카리.”
“슈야……? 잠입, 했었던 거 맞지……? ……혹시, 정체 들킬까 봐……. 내가……. 내가 일부러, 그 사람들. 배신자인 것처럼……. 잠깐만. 슈야……, 너 울어……?”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게 느껴지더니, 히카리의 질문 한 마디가 돌아오자 댐처럼 무너졌다. 그 위에 미적지근한 온기가 다가왔다. 괜찮으냐는 걱정과 함께, 꼭 연약한 걸 만지는 듯한 손길. 고엔지는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정의는 언제나 하나였다. 빛 아래 그림자가 있듯이, 히카리의 올곧음 아래 제 정의가 있었고……. 가끔 그것이 고엔지 슈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몽땅 삼키고 말았다. 지금이 딱 그랬다. 고엔지는 헛숨을 들이키며 히카리의 손을 잡았다. 그것이 살아있는 그의 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