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화성고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불꽃의 스트라이커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던 그 유명한 염성화의 재학 학교. FF에서 전국 1위를 한 이후, 에일리아 사건 해결의 주역이 된 걸로도 모자라 FFI의 우승컵까지 거머쥠으로써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조차도 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화성 고등학교 입학 시 교내에서 작은 소란스러움이 있었던 이가 두 명 더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금샛별과 천여름이다.
성화와는 중학교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으며 FFI 우승팀인 썬더코리아의로서 활약했다던 백발의 여학생.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성화와 샛별은 거의 매일 등하교를 같이하는 모습을 보였고 원체 매서운 인상인 성화는 샛별의 앞에서만 유독 순하게 풀어진 얼굴을 보이곤 했다.
일부는,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순간부터 전교의 주목을 모아버린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동급생들의 사이에 녹아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러한 염려는 학기 첫 자기소개 시간, 샛별의 차례가 돌아옴과 동시에 무산되었다. 그렇게나 많은 시선 속에서, 그렇게나 자신 있고 해맑은 웃음으로 인사를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이 단박에 떠오르는 밝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시작된 성화의 차례 때는, 샛별의 덕분에 아주 조금 다른 이미지를 기대한 반 친구들의 기대를 와장창 깨버리고 역시나 첫인상대로, 이제껏 텔레비전에서 봐 온대로의 인사를 꺼낸 그 덕분에 다시 한번 그 반에 웃음이 와르르, 하고 터졌더랬다.
오늘은 그 두 사람이 고등학교 2학년쯤 되어서 벌어진, 아주 소박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소박하지만 5년 뒤쯤 돌이켜보아도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존재할, 잊을 수 없는 두근거림의 이야기를.
...... 천여름의 소개는 하지 않는 거냐고? 그건 그냥 넘어가. 내 얘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내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이름만 쏙 빼는 게 이상할 것 같아서 이름만 댄 것뿐이니까. 그리고...... 몇 년 전 샛별이가 나에게 보여줬던 그 짙은 노을을, 나도 샛별이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쨌든! 이야기 시작한다?
***
샛별이는 강렬했던 첫인상 그대로, ‘덜렁이’라는 캐릭터성에 딱 맞는 행동거지를 보였어. 나야 뭐 익숙하지만, 완벽하게만 보이는 성화-다른 애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랬는데, 샛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랑은 대비돼서, 어딘가에 자주 부딪히고 한 곳에 집중하면 주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샛별이를 성화가 챙겨주는 모습이 동급생들에게도 일상처럼 자리 잡은 우리 학교였지.
반 아이들에게 조금 의외로 느껴진 점이 있다면 그것 또한 손이 많이 가는 샛별이를 성화가 아무런 불만 없이 봐주고 있다는 그 자체였을까? 물론 성화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고 그 점으로 보아 남을 돌보는 게 익숙할 거라고 짐작할 수는 있었겠지만, 나를 포함한 같은 반의 여학생을 대하는 모습과 샛별을 대하는 모습에서 사뭇 차이를 보이는 것이 의문의 시작이었겠지.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에 전혀 위화감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실제로도 그랬고-그저 친분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렇게 치면 나를 대하는 성화의 모습은 설명이 안 되잖아? 연애 소식에 민감한 친구들은 둘의 그런 모습에 일찍부터 자기들끼리 핑크빛 기류를 만들어 냈고, 그걸로 생기는 온갖 부담은 내가 그 옆에서 다 받아야 해서 얼마나 피곤했는지.
어쨌든,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그날도 평소처럼 샛별이랑 같이 매점에 갔다가 각자 음료수를 하나씩 손에 들고 교실로 돌아오는 중이었어. 2학년이 돼서 성화는 다른 반으로 갈라졌는데, 그래도 새로운 친구들 덕분에 잘 지내는 것 같다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복도를 걷고 있었지. 코너가 가려서 안보이니까 똑바로 앞에 보고 조심해서 가라고 얘기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알았다면서 다시 부주의하게 앞으로 돌아보는 샛별이가 누군가에 무겁게 부딪혀서 휘청거리는걸. 그 애가 급하게 잡아주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거야. 누군지 보려고 시선을 드는데, 미안, 괜찮아? 목소리가......
“성화야!”
“성화였구나...... 다행이다. 성화가 아니었으면 넘어질 뻔했잖아.”
헤실헤실 웃으면서 미안하다 사과하는 샛별이의 얼굴만 보면...... 안 돼! 나까지 약해지면! 그런데...... 두 사람은 계속 그 자세로 있을 거야?
“미, 미안.”
“아, 아니...... 나야말로! 미안해......”
샛별이의 허리에서 손을 뗀 성화와 덩달아 분홍빛으로 어색해진 샛별이의 사이를 가벼운 한숨으로 무마하고 보니 ...... 옷에 음료수를 쏟아버린 것도 모를 정도였다니. 내가 못 살아 정말.
“난 정말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으니까 얌전히 갈아입어.”
그리고 성화도...... 안 괜찮을거고. 여러 의미로 말이지.
자기 체육복을 빌려주겠다는 성화의 말에 교실 앞에서 기다리면서 나눈 이 짧은 대화 속에서도 둘의 연애-아직은 아니지만-사정을 떠올려야 한다니. 이 빚은 언젠가 꼭 돌려받겠다고 다짐했었지. 내 연애사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고...... 큼큼, 이 이야기는 다음에!
어쨌든 샛별이는 하필이면 오늘 체육 수업이 없어서 체육복을 집에 두고 왔고, 성화는 항상 월요일에 체육복을 학교에 가져다 두는 편이라 다행이었지. 때맞춘 우연은 운명이라고도 하던가? 그래, 운명이라고 하자. 운명처럼 다가온 체육복-응? 이게 아니야?-이 샛별이에게 건네지고, 둘은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지.
종이 울리기 전에 금방 갈아입고 오겠다던 샛별이가 점심시간이 끝나버리기 직전에야 성화의 체육복을 입은 채 교실로 뛰어들었어. 왜인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책상에 앉자마자 바로 엎드려 버렸기에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지 물으려 했는데, 마침종이 울림과 동시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자리로 돌아가야 했지. 수업이 시작하고는 다행히 일어나긴 했지만, 샛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바람에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걱정이 돼서 종례가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 갔더니 세상에, 나 참 기가 찼다니까? 아파서 붉어진 줄만 알았던 얼굴이 글쎄......
“여름아, 나......”
“왜 그래? 많이 아파?”
“성화랑 언제 이렇게 차이가 나버린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들려오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자세히 보니......
“하아, 샛별아......”
“그렇지만...... 성화도 분명 중학생 때는 나랑 비슷한 키에, 그러고 보니 오늘 눈높이도 한참 올려다봐야 했었네? 또 소매는 왜 이렇게 긴거야......”
두서없는 말들을 줄줄 뱉어내는 샛별이에 내가 다 정신이 없어져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지.
“너 그럼, 성화가 혼자 그렇게 커버려서 설렌...... 거야?”
“...... 그런 것 같아......”
“네가 기다린다고 해놓고, 그렇게 안달이 나버리면 어떡해. 더 오래 걸려도 되겠어?”
몇 년 전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되어버린 그 대화의 주제를 꺼내며,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지 넌지시 던져보았어.
“...... 응...... 오히려, 그래서 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붙었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좋아하는 부분이 늘어나는걸.”
그리고 이 아이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그 마음은 더욱 그 크기를 더해감으로,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변화는 항상, 현재라는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 왔어.
***
이야기는 이게 다야. 매우 소소하지만, 그 소소함이 하나하나 모여서 지금의 커다란 일상을 만들어왔다는 이야기. 뒤늦게 내 얘기를 덧붙이자면, 두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도 용기를 많이 얻었어. 행동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정말 바보 같지 않아? 그런 바보 같은 점이 누구 씨를 자꾸 생각나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