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이

너,

세상에동명이인이얼마나많은데 2024. 8. 1. 14:11

“정말? 나 가도 돼?”

“물론. 이제 외출도 가능하다며. 축하의 의미로 초대하는 거니까, 받아.”

작은 환호성을 내뱉으며 고엔지가 건넨 것을 받아 드는 히카리의 시선은 라이몬 중학교의 로고와 간단한 지도가 그려진 초대권에 꽂혀있었다. 기대에 가득 찬 두 눈을 떼지 못하는 히카리를 보고 그렇게나 좋을까, 싶으면서도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것이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진 고엔지가 설명을 이어갔다.

“날짜는 거기에 적힌 대로 5월 12일.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야. 학교에 도착하면 입구 바로 앞에 내가 보일 거니까, 그쪽으로 오면 돼.”

“슈야가?”

너는 축제 참가 안 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묻고 있는 히카리를 마주하기가 쑥스러워, 자연스럽게 시선을 비끼고 답하는 고엔지이다.

“이번에는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안내위원을 맡았어. 물론 축구부 행사에는 참여할 거지만. 네가 아직 몸이 안 좋으니까, 내가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말? 고마워, 슈야. 부모님께도 말씀드려서 꼭 갈게!”

부러 자신을 위해 수고해 주는 이에게 감사를 표하며 초대권 위에 손 글씨로 단정하게 쓰인 초대 학생의 이름, 고엔지 슈야, 다섯 자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는 세이나 히카리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라이몬 중학교 축제 당일. 학교는 역시 입구부터 시끌벅적했다. 부모님께서 차로 정문 앞까지 데려다 내려준 히카리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걸어오는 것은 고엔지였다. 히카리도 이제 막 도착하여 타고 온 차의 뒷모습에 대고 손을 흔들어 부모님을 배웅하던 참이었다.

“왔어?”

“응, 안녕. 병원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 자, 여기 팸플릿. 둘러보고 체험하고 싶은 부스나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말해. 시간표도 나와있으......”

무언가 평소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고엔지가 하던 말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는, 풀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쭈뼛거리는 히카리가 보였다.

“...... 저기, 슈야!”

“왜 그래, 히카리.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나 오늘 어때?”

“어떻냐니?”

“아이참, 옷 말이야. 옷! 우리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학교에 오는 거라, 원래 입던 교복을 입어봤는데......”

“괜찮은데?”

즉석에서 나온 고엔지의 답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히카리의 얼굴은 금세 새빨개지고, 히카리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고엔지를 앞서가더니 다시 뒤돌아서서는 빼액 소리쳤다.

“숙녀가 용기 내서 물으면 잘 어울린다고 해줘야 하는 거야!”

아.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그제야 허둥거리며 히카리에게 다가가자, 그것도 연기였던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숙녀였다.

“...... 놀랐잖아, 히카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히카리의 팔목에 입장 팔찌를 둘러주는 고엔지를 보고서도 히카리는 그저 즐거운 듯했다. 뭐, 이런 일에는 이미 한참 전에 익숙해진 고엔지였기에 별일 없이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히카리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연기가 아닐 수도 있는걸?”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입구를 가득 채운 색종이 장식과 학생들의 축제 준비 과정 및 홍보를 녹화해 둔 영상, 부스로 꾸며진 교실들이었다. 1층은 전시부, 2층은 체험부, 그리고 3층은 공연부 위주로 시설을 설치해 둔 교실을 차례로 둘러보며 히카리의 걸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문학부에서 낸 월간지를 읽고 퀴즈를 풀어 얻은 점수로 상품을 타거나, 뜨개부에서 만들어 낸 뜨개질 작품을 감상하거나 하는 일만으로도 신이 나서 조잘대는 히카리의 입술은 닫힐 줄을 몰랐다.

2층으로 올라가서는 고엔지의 시선이 그보다 더 바빠졌을지도 모르겠다. 각 동아리의 부스에서 팔고 있는 컵케이크와 츄러스,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발걸음은 그대로 옮기면서도 시선은 고정되어 뒤를 보며 걸어가는 모양새가 되는 히카리를 보고서, 고엔지는 아직 병실에 누워 잠들어 있는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런 그가 히카리에게 잠시 기다리라 한 후 얼마 안 있어, 유독 히카리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시나몬 츄러스 하나를 손에 들고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 주는 거야? 정말?”

“그럼. 이거, 먹고 싶어 했잖아?”

“그렇긴 한데......”

왠지 미안해하는 표정의 히카리에 고엔지는 어서 받으라는 듯 츄러스를 쥐고 있던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사양 말고 먹어. 나도 친한 녀석한테 그냥 받아온 거니까.”

“고마워, 슈야!”

츄러스를 받아온 것은 ‘친한 녀석’도, ‘그냥’도 아니었지만, 고엔지는 히카리에게 그것을 굳이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유카가 생각나서 그랬다고 하면, 또 놀릴 게 분명하니까.’

고엔지 슈야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그가 줘버린 많은 것들에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러고 보니 축구부는?”

“응?”

혼자만의 생각에 잠시 빠져있던 고엔지를 히카리의 맑은 목소리가 깨워 데려왔다.

“축구부는 뭘 준비해?”

“궁금하면 가볼래?”

“응! 이런 건 원래 축구부를 제일 먼저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슈야, 축구부잖아.”

“미안, 미안. 나도 정신이 없었네.”

히카리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와 중앙현관을 지나 축구부실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을 때 들려온 건 잠깐의 정적. 그러나 곧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큰소리가 났다.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축구부원 몇 명이 튀어나와 냅다 고엔지 슈야를 데리고 구석으로 들어가서는 함께 온 히카리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저기......”

멀뚱멀뚱 서 있던 히카리가 몇 번이나 거는 말소리는 닿지 않는 듯, 이 소란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반쯤 포기하고 부실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때마침 나타나 준 매니저들에 의해 상황이 정리되었다.

 

드디어 시작된 축구 시합! 텔레비전에서 보며 응원하고, 고엔지에게 건너 건너 얘기만 듣던 바로 그 라이몬의 선수들이 이렇게 눈앞에서 각자의 포지션에 자리 잡아 서 있는 모습에 히카리는 가슴이 벅차올라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은 간신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얼굴이 새빨개져 운동장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꼭 쥐고 있는 그 모습에 고엔지는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만.

항상 해설을 맡아주던 카쿠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히카리와 인사를 나누었고,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킥오프로 고엔지에게 공이 넘어갔다. 학교 축제로 개최되는 축구부의 이벤트이다 보니 시합은 축구부원이 아닌 학생들도 섞여 함께 참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축구부 에이스 스트라이커인 고엔지 슈야의 플레이가 눈에 띄게 환상적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히카리가 응원하는 팀이 고엔지가 속한 팀인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점점 빠져들게 되는 시합, 선수들과 한마음이 되어 함께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 골을 넣으면 뛸 듯이 기쁘고, 공을 빼앗기면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지속되어 손의 땀을 옷에 문질러 닦을 수밖에 없는, 세이나 히카리가 사랑에 빠진 축구란, 그런 것이었다. 주위의 공기까지 뜨겁게 달구는 불꽃의 에이스 스트라이커, 고엔지 슈야. 그의 온도가, 세이나 히카리까지 작열시켜 그가 사랑하는 쇳물에 풍덩, 빠뜨려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형태로 만들어 내었지?

“이 시합 말이야, 대형을 바꿔서 4-3-3으로 진행하면 더 수비가 쉬워질 것 같지 않아?”

“응?”

나지막이, 히카리가 던진 물음에 아키가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히카리?”

“아니, 그냥...... 생각을 해 봤거든. 지금은 슈야네 팀이 1점 차로 앞서고 있잖아?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는 이 점수 차를 지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서.”

“계속해 보렴.”

심판을 보던 히비키 감독 또한 히카리의 말에 흥미가 있는 듯했다.

“아, 네! 그러니까...... 수비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형을 바꿔서, 정면에서 들어오는 상대 팀을 우리 미드필더가 측면에서 압박하면서도 공격을 보조할 수 있는 전략이 좋지 않나...... 싶어서요.”

히비키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제넘은 발언이 아닐까 망설이다가도 어느새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히카리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금세 수첩을 꺼내 들어 히카리에게 조잘조잘 말을 거는 하루나였다.

“와아, 히카리 언니, 정말 대단해요! 전부터 축구를 좋아하셨나요?”

“고마워. 축구를 좋아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병원에서 할 일도 없고 해서...... 봤던 시합을 녹화해서 보고, 또 보고. 여러 시합을 모아놓고 비교하는 게 재밌기도 해서 혼자 이런저런 전략을 짜보다 보니 오늘도 어느새 습관이 튀어나와 버린 것뿐이야.”

조금 쑥스러운 듯 괜히 볼을 긁적이며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리는 히카리에 히비키 감독도 한마디 얹어주었다.

“단기간에 이렇게까지나 경기를 보는 눈이 넓어지다니, 대단하구나. 넌 재능이 있어. 방금 그 작전도 아주 좋았고.”

“정말요? 감사합니다!”

부끄럼을 타던 조금 전까지의 소녀는 어디 가고, 감독의 칭찬에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 해맑게 웃어 보이는 히카리가 있었다. 자신의 쇳덩이가 힘차게 두들겨져,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말. 새싹을 내어 태양을 바라보던 작은 씨앗이, 언제든 태양을 맞이하는 해바라기의 씨앗이었다는 말.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히카리는 다시 자신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오늘 어땠어?”

축구부의 시합이 고엔지네 팀의 승리로 끝나고, 다시 히카리와 몇 가지 부스를 더 돌아다니다가 축제가 끝날 즈음의 시간이 되어서야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히카리가 즐거워 보였으니, 무엇보다 다행이지만 동시에, 누가 봐도 지쳐가는 기색의 히카리를 보고 하나만 더 들르자는 걸 달래어 데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운동장 입구의 벤치로 히카리를 안내해 앉히고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 건네는 고엔지에 히카리도 사양하지 않고 고맙게 받아 들며 답했다.

“즐거웠어. 이런 축제는 오랜만이기도 했고, 축구부도 모두 좋은 친구들이었고! 축구라는 거, 역시 좋더라.”

“그래? 다행이네.”

“나, 오늘 슈야의 시합을 직접 보고 축구가 더, 더 좋아졌어. 가슴이 뜨거워지는 스포츠! 맞지?”

자신을 마주 올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얼굴의 히카리에 고엔지도 깊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히카리의 말에 묘하게 굳은 표정과 함께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있잖아, 아까 축구부실에 막 들어갔을 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 거야? 문을 열자마자 널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소곤거렸잖아! 그것도 다들 날 보면서 얘기하는 것 같던데...... 정작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

차마 당사자 앞에서 여자친구냐느니, 좋아하는 애라도 생긴 거냐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고엔지 슈야는 어물쩍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 별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고, 슬슬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실 시간 아니야?”

“수상한데...... 뭐, 오늘은 초대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겠어! 으음,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긴 하는데......”

겨우 한고비 넘긴 듯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고엔지가 말끝을 흐리는 히카리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데?”

“어떡하지......? 아직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무리했나 봐.”

미안함과 멋쩍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힘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히카리의 시선을 가로막는 것은,

“업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등을 내어주는 고엔지 슈야였다. 커다랗게 유니폼에 박힌 등번호, 10번.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부모님께서 기다리시는 것보다는 낫잖아? 얼른.”

아, 에이스 스트라이커란 어쩜 이렇게나 다정하고 듬직한지. 괜히 두근거리는 이 감정을 모른 체 하고, 히카리가 말을 꺼냈다.

“슈야, 혹시 다른 애들한테도......”

“응?”

그리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는 히카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실례할게.”

같은 또래인데, 슈야의 등은 참 넓구나. 따뜻하고......

문득 그런 감상에 젖어 가만히 그의 등에 기대어 있다가도 새삼 그것을 자각하고 낯이 뜨거워져 혹여나 그 열기가 닿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상체를 들어 올리면,

“조심해, 꼭 붙어.”

“으, 응!”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금 몸을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엔지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히카리!!!”

“아빠......”

히카리를 업고 있던 그에게서 낚아채듯 딸을 안아 받고서는 금방 차 안에 넣어버리고 아들뻘 되는 소년과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되는 히카리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런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건지. 창문을 내려 어머니와 몇 마디 주고받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쳐 웃어주는 히카리에 고엔지도 그 아버지와의 어색한 분위기를 피한 채 미소로 화답하여 주었다.

“내일도 병원에 올 거지?”

“아아.”

“그럼, 그때 봐. 오늘 고마웠어!”

멀어지는 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드는 히카리를 보며 고엔지도 손을 위쪽으로 뻗어 인사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 쪽으로 돌아가려 뒤돌아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내가 왜 그랬지......?’

오래도록 의문으로 남을 행동을 가슴속에 품어버린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