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이

불길이 일고

세상에동명이인이얼마나많은데 2023. 7. 26. 17:36

내가 너에게 저지른 잘못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가장 흉한 상처를 남기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으로 지치게 하고, 그럼에도 끝까지 기다려 줄 것이라는 서로 간의 믿음으로 또 한 번 너를 아프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휘둘렀으나, 그것이 실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너를 주저앉혔고, 그 선택을 한 이상 나는 혼자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너를 뒤로 남기고, 옆을 비운 채, 나는 홀로 앞을 바라보았다. 나의 외로움 따위는 너의 그리움에 비할 바도 못 되었겠지. 수없는 너를 남겨두고 온 그 앞은 빛이 없어 어두웠다. 그 어두운 곳에 가장 먼저 불을 밝혀 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불꽃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아간 자리는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이 아닌 햇살이 나를 비춰주었다. 그간의 외로움이나 서글픔, 공허함 같은 것들은 너의 뜨거움에 연소되어. 공기 중에 가득한 빛의 입자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이킬 수는 없어도, 앞을 향해 나아갈 수는 있으니까.

  그래, 뒤돌아보지 않는 너였구나. 뒤돌아볼 필요가 없는 우리였구나. 너는 언제나 눈물을 훔치고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내가 향할 그곳에서, 나를 또 한 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 번의 기다림 끝에 널 다시 품에 안고. 뒤처진 건 항상 나였듯이, 앞서간 너에게로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