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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인간 2022. 5. 27. 22:14

    012
    설기님 커미션

    히카리가 이곳에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제 고향의 다른 존재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거처에 와 있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고엔지 슈야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 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수들의 소굴에 인간이 왕래하게 되면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위험에 빠지는 것은 고향의 주인들이었으므로. 그러나 불안을 느낀 그들이 불안 요소의 제거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예측하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옆에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며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고엔지 슈야의 탓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가 두려워 그보다 약한 존재를 표적으로 삼은 이들이었다. 그 존재가 강한 이를 더 강하게 또는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이였음을 간과한 결과였다. 용이라는 생물이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계약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고엔지 슈야와 세이나 히카리는 계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결론적으로 완전한 남남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쪽을 제거해버려도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이나 히카리가 평범한 인간인 이상 생활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가야 했지만, 본인이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인간이 이곳을 들락거린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곳의 주인들이 위험해진다. 자신과는 종도 다른 생명체들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인간을 고엔지 슈야가 사랑하게 되었을 리 없다. 어쨌든,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히카리를 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은 고엔지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다른 이들에게는 유일한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용은 인간을 위해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인간에게 손을 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질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경고를 받은 이들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용은 그럴만한 힘이 있으며 자신들은 그런 그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눈앞의 약한 인간 하나를 어떻게든 없애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 불안했고 용에게 협조하여 그의 힘을 빌릴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용의 주된 거처인 한 동굴 안에는 거대한 마수에 비하면 작디작은 인간이 벽에 기대앉아 흙바닥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인간은 적당히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햇살을 맞으며 알아듣는 이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드리워지는 커다란 그림자들에 고개를 들어 그들을 마주한 인간에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으나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슈야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바닥에 흐트러지며 내려앉았다.


    마을에서 돌아온 고엔지 슈야는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자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와 품에 안기던 세이나 히카리가 보이지 않았다. 낮잠이라도 자는 것이라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 며칠간 자신의 존재를 없는 것으로 여기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던 그들이 오늘은 묘하게 제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해진 그는 황급히 히카리가 기다리고 있는 굴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한 그를 맞아주는 것은, 새까만 피비린내. 잠시 눈을 붙이려 누워있는 것과 같이 보였다. 자는 도중 몸을 뒤척일 때처럼 흐트러진 자세에 입을 살짝 벌리고 숨 쉬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그 주변을 가득히 적시고 있는 그것만 없었다면. 한쪽 어깨에서부터 다른 쪽 허리께까지, 사선으로 길게 그어진 커다란 상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며 힘겹게 걸음을 떼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그의 당황한 모습에 히카리는 미약하게 키득거렸다. 그조차도 고엔지 슈야를 진정시키려는, 세이나 히카리의 마지막 장난이었다. 계약자도 아닌 타인에게 치유술은 사용할 수 없다. 시도한다 해도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탓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닥칠 커다란 절망을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희망이 꺼져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슈야. 고마워."

    무엇이 그리 고마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막지 못한 것은 자신의 책임인데도.

    "...후회하지 마. 미안해, 사랑해."

    마지막은 그게 다였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무엇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인지,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은 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었다. 사실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시하고 있는 것은 세이나 히카리 뿐이었고, 고엔지 슈야는 피하기에 급급했다. 자신이 없었다. 확신 또한 없었다.

    인간이 자신을 희생해가며 기다린 결과는 처참했다. 축 늘어진 눈앞의 껍데기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직 붙들려 있는 온기가 자신의 것인지, 떠난 이가 남겨두고 간 것인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고엔지 슈야는 사랑하는 인간의 마지막 부탁까지도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선택하지 못했던 자신의 다른 선택을 계속해서 곱씹어 볼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기나긴 생을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 채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동굴 밖 입구에는 나약한 존재들이 합당한 변명을 하려 기웃거리고 있었으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차갑지도 못한, 표정을 읽을 수조차 없는 강력한 존재였다. 따스한 불꽃으로 누군가를 지키던 용이라는 것은 그가 지켜줄 대상과 함께 사라져버린 듯했다. 강하고 따뜻하게 빛나던 불꽃은 뜨겁기만 했고 태워버릴 것만을 갈구했다.

    행동의 이유를 묻는 시선에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버럭 대답을 외치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일말의 의지까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말려줄 세이나 히카리가 이제는 없다는 사실이 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걱정대로 인간은 고향의 주인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러나 존재로 인한 위험이 아니었다. 위험을 불러들인 것은 부재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마른 계곡은 괴수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나마 있던 물기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은 빠르게 사방으로 번져갔다. 원래 그곳에 있던 것들은 죽거나 크게 다치고 도망가 여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붉은 용뿐이었다. 텅 빈 것으로 가득 찬 붉은 것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시원한 비가 내렸다. 영원히 그 앞에 서서 자리를 지킬 듯 보였던 그가 빗물에 젖어 무너졌다.

     

    이제 난리 통에 살아남은 마수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퍼뜨리고 다닐 것이다. 계약도 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을 데려와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의 고향, 가족을 전부 태워버린 어리석고 악한 붉은 용. 이제 그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동족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이종족과 섞여 살 수도 없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너무나도 약하다. 고엔지 슈야는, 완전한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가 바라던 대로.


    세이나 히카리와 함께한 계절은 가을, 겨울, 봄, 여름. 사계절을 모두 한 번씩 지내고 히카리는 고엔지를 떠났다. 그 뒤로 고엔지 슈야가 사계절을 혼자 보낸 햇수는 몇십 년이 지났고, 세기를 포기 한지는 몇백 년이 지났다. 그동안 붉은 용은 인간과 함께했던 일 년을 그리워하며 몇백 년을 지냈다. 대부분의 인간이 용도, 마법사도, 용사도 모두 잊은 시대가 되었을 때.

     

    "저기, 나 좀 도와줘."

    험한 산길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가끔 길을 잃고 흘러들어오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를 부른 목소리가 기억 속 그 목소리와 완전히 일치하지만 않았다면 모른 척 지나쳤을 것이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투명한 빛을 가득 담은 듯한 그 머리카락도, 한두 개의 별이 떠 빛을 비추는 밤하늘과 같은 눈동자도. 전부 너를 떠올리게 했다. 오랜 시간 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마음이 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심한 상처는 없는 듯 보였고 살짝 발목을 삔 것 같았다.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작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이리저리 살펴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체념뿐이었다. 더 이상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때도 보통의 인간이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이나 히카리만이 고엔지 슈야를 온전히 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기억조차 없을 것이었다. 그저 닮은 사람을 몇백 년에 한 번 마주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동안 잘 지냈어?"

    아. 이번에는 그쪽에서 보이는 내 모습도 이 사람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하게 생겼나 보다. 인간의 눈으로 용의 본모습을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처리해야 할 정보가 많기 때문에 인간의 뇌는 편한 대로 겉모습을 바꿔서 받아들인다.

    "사람 잘못 봤어."

    "그대로인데? 내가 좋아하던 금빛 머리칼의 고엔지 슈야."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생긴, 이름이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을 들어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세이나 히카리였다.

    언제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잃지 않고 행복으로 밝게 빛나는 세이나 히카리다.

     

    작은 인간이 돌아옴과 동시에, 강인하게만 보였던 붉은 용은 한없이 무른 용이 되었지만

    그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웃음은 이제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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